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56년 헝가리 혁명 (문단 편집) == 전개 == || [youtube(8FckhPmtE1A)] || |||| 1986년 혁명 30주년을 기념하여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Cry Hungary: A Revolution Remembered'. 10년 후인 1996년 40주년을 기념하여 후속편이 제작되었는데 민주화 이후 체제 전환 과정에 있던 헝가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aR8pxjnskY|#]]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ole_in_flag_-_Budapest_1956.jpg|width=100%]] || || 국기 가운데에 난 구멍은 시민군이 저항의 의미에서 공산당의 상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가운데에 구멍이 난 헝가리 국기는 이후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해마다 헝가리에서는 10월 23일이 되면 이 국기를 혁명 기념 공식 행사에서 게양한다. 이렇게 국기에서 공산당의 상징을 잘라내는 행위는 [[동유럽 혁명|33년 후]] 동유럽 각국에서 공산당 독재 정권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재현되었다. || 1956년 10월 6일에 1949년 라코시 정권에 의해 처형된 [[https://en.wikipedia.org/wiki/L%C3%A1szl%C3%B3_Rajk|러이크 라슬로]](Rajk László)의 장례식이 열리면서 혁명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러이크 라슬로는 전형적인 [[토사구팽]]의 표본격인 인물이었다. 비슷한 인물을 들자면 [[니콜라이 예조프]]가 있는데 러이크는 내무부 장관으로 있었으며 비밀경찰을 만들고 우익과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여론조작용 재판을 주도한 뒤 외무부 장관으로 영전했는데 라코시 정권은 러이크가 세를 얻자 그를 권력에 대한 위험으로 보고 1949년에 티토주의자, 서방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였다. 1956년 10월 23일 오후 부다페스트에서 2만 명이 모인 가운데 스탈린 동상이 철거되었고 시민들은 스탈린 동상의 머리를 깨부수어 거리에 끌고 다녔다. 같은 날 밤 8시 경 라코시파 중의 하나인 제1서기장 [[https://en.wikipedia.org/wiki/Ern%C5%91_Ger%C5%91|게뢰 에르뇌]](Gerő Ernő)[* 참고로 이 양반은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여단 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학살하고 다녀서 "바르셀로나의 백정"이란 별명을 얻었다.]는 시위대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내고 1시간 반이 지난 후 시위대는 위와 같은 내용의 방송이 나간 라디오 부다페스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게뢰는 해도 해도 안 되니 시위대들은 파시스트라는 선동도 해 봤지만 애초에 너지 임레는 공산주의자였던지라 파시스트 시위대가 공산주의자를 복귀시키라는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말이 되어 씨알도 안 먹혔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가 총에 맞았다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마침내 보안군(ÁVH)에 의해 최루가스와 기관총을 동반한 유혈 진압이 이뤄지면서 첫 사망자가 발생하자 본격적 혁명이 시작되었고 다음 날 라디오 방송국이 점거되었다. 10월 24일 헝가리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입하면서 시민군과 소련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헝가리군 일부가 시민군에 편입하면서 봉기는 격화되었다. 10월 25일에 들어서면서 봉기는 부다페스트뿐만 아니라 헝가리의 여러 주요 도시로 번졌고 다음 날 의사당이 시민군에 의해 점거되면서 라코시, 게뢰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소련으로 도망가고 소련은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은 너지 임레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너지 임레를 수상으로 옹립해 온건파 신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10월 28일부터 11월 4일까지 전투가 일시 중지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신정부는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개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일당제 폐지, 비밀경찰 폐지 등 매우 화끈한 개혁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소련 측은 당혹스러워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그만두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소련 측은 너지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가 실수한 것 정도로 여겨 그를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소련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매일같이 헝가리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었고 너지는 소련 대사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대표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소련군의 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소련 측은 이미 헝가리 상황은 통제불능이라는 이유로 이에 응하지 않았다. 소련군의 강경한 진압에 분노한 헝가리인들도 계속 무장투쟁을 이어나가면서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었다. 결국 소련 정부에 환멸을 느낀 너지 임레는 헝가리의 중립 선포,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 소련군의 헝가리 철군을 요구하면서 서방과 유엔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너지가 자신들을 배반했다고 여긴 흐루쇼프는 이를 거부하고 11월 4일 [[이반 코네프]] 휘하의 대규모의 소련군을 헝가리에 투입시켰다. 이미 그 전인 11월 3일에는 혁명 정부의 신임 국방장관 멀레테르 팔(Maléter Pál)이 휘하 사절들과 함께 부다페스트 근교의 퇴쾰(Tököl)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되었다. 4일 오전 3시에 부다페스트 방면에 소련군 기갑부대가 투입되었으며 뒤이어 이들은 부다페스트를 조각내어 버리고 모든 교두보를 장악했다. 소련군 전차와 대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성이 부다페스트 전역을 뒤덮었다. 이날 오전 5시 20분에는 너지가 마지막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유 헝가리가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헝가리와 전 세계에 알렸다. 헝가리 전역에서 헝가리군이 소련군에 무장해제되었다. [[게오르기 주코프]]에 의하면 9일까지 헝가리군 12개 사단과 2개 기갑연대, 헝가리 공군 전체가 무장해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군은 종종 저항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헝가리군은 대부분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혁명 진압에 참여하는 것은 거부하며 탈영했으며 소수는 시민군 사이로 스며들어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 부다페스트의 시민군은 [[몰로토프 칵테일]] 등을 이용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11월 11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약 2주 간에 걸친 혁명은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끝나게 되었다. 약 3,000여명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으며 부상자는 1만 3천에서 2만여명에 달했으며 민간인 희생자는 1569명이었다. 사망자 중 53%는 노동자였고 사상자의 절반 이상이 30살 미만이었다. 격렬한 저항에 소련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어 699명이 전사하고 1,450명이 부상, 51명이 실종되었다.[* 전사자 722명, 부상자 1,251명이라는 설도 있다.] 너지 임레는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대사관을 잠시 나오던 중 소련에 의해 체포되어 너지의 개혁정책에 큰 혐오감을 느끼던 스탈린주의자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지배하던 [[루마니아]]로 압송되었고 1958년 6월 16일 비밀리에 처형당했다. 전(前) 헝가리 외무장관 예센스키 게저(Jeszenszky Géza)에 의하면 너지처럼 혁명 이후에 처형된 헝가리인의 숫자는 350명이 넘었다. 너지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고 [[동유럽 혁명|공산 정권이 붕괴되던]] 1989년 정식으로 복권되어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서 31년만에 정식으로 장례식이 열려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만명의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운집했고 이는 혁명 발발 이후 33년만에야 이루어진 헝가리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라코시 마차시도 '개혁을 거부하여 혁명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소련에게 [[토사구팽|버림받았다]]. 그나마 소련의 말을 잘 들었던 탓에 처벌은 면했으나 소련으로 강제 망명을 당해야 했고 소련 관할이던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감시 속에 살다가 1971년 2월 5일에 79번째 생일을 한 달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000년대 와서야 시신이 헝가리로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